9호선 여의도역에는 여러 시인의 시가 붙어있는 다른 역들과는 달리 스크린도어에 딱 하나의 시만 있습니다. 반갑게도 우리 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되었던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시작하는 깃발입니다. 저는 흔히 생명파로 불리우는 청마의 시를 좋아해서 교과서 외의 시로 유일하게 외우고 있는 시가 그의 “생명의 서”입니다. 젊은 날 울적한 기분이 들 때는 이 시를 두 주먹 불끈 쥐고 소리 내어 읊으면서 제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인하곤 했었는데요. 오늘 다시 그 기분으로 돌아갑니다.
생명의 서(書)
유치환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懷疑)를 구(求)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愛憎)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灼熱)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永劫) 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砂)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하게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砂丘)에 회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2020.08.14)
건너편 맥주집에서 제 옆의 자리에 모자를 쓴 아짐 한 분이 들어와 앉습니다. 장난기가 발동한 제가 먼저 더위나 식히라고 한 잔을 건넸습니다. 망설임 없이 시원하다는 화답으로 대화가 시작됩니다. 곧 이어 검정 원피스 차림의 아짐이 오더니 앞자리가 아닌 옆자리에 앉습니다. 당연히 자연스럽게 잔을 교환하며 분위기가 무르익습니다. 한참 후 그 아짐들이 기다리던 아재들이 도착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본연의 우리로 돌아와야 하는데 이미 농익은 자리라 쉽지 않습니다. ㅋㅋㅋ아아! 그 아재들 기분이 떨떠름했을 것입니다. (2020.08.13)
바지를 입을 때면 꼭 등 뒤쪽 셔츠를 집어넣지 않아 다시 허리띠를 풀게 됩니다. 바지를 벗을 때는 주머니의 물건들이 모두 바깥으로 뛰쳐나와 이를 주워 담느라 등을 구부리게 됩니다. 옷 하나 바로 못 입는 그런 불행한 인생은 떨쳐버리자며 오늘 굳게 다짐하고 바지를 입고 집을 나섰습니다. 거리에서 등 쪽으로 슬쩍 점검을 하는데 이런 또 삐져나와 있습니다. 아까는 분명 제대로 입은 것 같았는데. 이윽고 도착한 휘트니스센터 바지를 조심조심 벗어서 로커에 넣으려는 순간 동전들이 우르르르..... “에라 모르겠다, 그냥 나 이대로 살래!” (2020.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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