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여동생만 다섯입니다. 셋째가 딸이자 애를 받으러 오셨던 할머니께서는 그 자리에서 돌아서서 담배만 피우셨다고 합니다. 이후는 제 기억입니다. 아들을 낳아야 하는 과업을 떠안은 어머니께서는 넷째를 가지시고 유난히 아픈 날이 많았습니다. 어느 날 새벽 그 넷째 여동생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저는 이제 어머니께서 아프실 일이 없을 것 같아 빙그레 웃었는데 "또 딸이다"하며 실망해 하시던 표정이 역력합니다. 다섯째 때 사실 저는 아무렇지 않았지만 눈물로 어머니의 슬픔을 대신했습니다. (2014.11.25)
어제 지난 주 내내 이런 저런 술로 혹사를 시킨 속을 달래주려 생선탕을 전문으로 하는 인근의 음식점을 찾았습니다. 마침 점심 시간이지라 손님들이 많은 탓인지 4인용 자리 몇 개만 남아 있습니다. 앉으면 그만이겠지만 "혼자인데 괜찮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선뜻 대답할 리가 만무합니다. 계속 머뭇거리자 "다른 데로 가겠다."고 말하고 인근 김치찌개 집으로 향했습니다. 앉으라 했어도 나는 속도가 빠르므로 그렇게 매상에 지장은 없었을 텐데. 그래도 이해는 충분히 합니다.(2014.11.24)
지금이야 문하나 열면 화장실이지만 옛날에는 요강이 결혼필수품이었습니다. 40여 년 전일까요? 이종누이의 혼수를 전달하러 간 시댁 앞길에서 이불 짐을 드는 순간 갑자기 속에서 요강이 떨어지더니 떼구르르 구르면서 깨지고 말았습니다. 저와 같이 간 이종동생의 얼굴은 혼비백산. 달리 수습할 길이 없어 둘만의 비밀로 간직하기로 했었습니다만 저는 마음속으로 두 분의 결혼생활이 원만하기만을 바랬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가지 않더라고요.(2014.11.24)
제가 사가지고 온 음식으로 아침 식사를 마치신 아버지께서는 지금 명상 수행 중에 계시며 어머니께서는 설거지를 하십니다. 아버지 앞니 몇 개가 달아난 것을 제외하고는 두 분 모두 지난달과 거의 다름이 없습니다. 특히 어머니 치매가 제자리에 머물러 있음을 마음 깊이 감사드리는 아침입니다. 다만 아버지께서 어머니를 좀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하셨으면 하는 바램을 뒤로하고 저는 또 일찍 올라갑니다. (2014.11.23)
사실 결혼 후 10여년 이상을 둘 사이의 성격과 가치관의 차이로 몹시 힘든 시기를 보냈습니다. 어제 아침 애엄마에게 "삶의 격을 10점 만점으로 했을 때 과거에 당시는 이미 7정도의 수준이었고 나는 3정도에 머물렀다. 그 차이를 잘 참고 견뎌 내줘서 고맙다."는 말을 건넸습니다. 아주 기분이 좋으셨나 봅니다. 처제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이그 살살이 형부!'라고 하더라며 저녁에 집에 들어와서도 마냥 즐거운 표정입니다. 아마 저 며칠간 술을 먹어도 될 것입니다. (2014.11.22)
건물 바닥을 열심히 닦고 계시는 청소 아짐을 안으로 오시라 해서 홍삼정차 한 잔을 드렸습니다. 무슨 이야기로 기쁘게 해드릴까 생각하다 역시 자녀 이야기로 " 서울대 합격한 손자는 지금 잘 다니고 있습니까?" 갑자기 얼굴이 환해지시면서 " 네에 광주 자기 학교에서 두 명 합격했는데 그중 하나가 우리 손주에요. 고마워요, 사장님은 저에게 너무 잘해주셔서 꼭 오빠 같으셔요. 지난번과 똑같이 오빠라고 하십니다. 홍삼정차 한 잔에 오빠가 되었어요. (2014.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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